세월이 참 빠르다는 것을 느낀다. 어느새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 하늘의 이치를 깨달을 나이인 지천명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향과 어머님을 그리워하면서 지낸지도 벌써 2년이 다되어간다. 내 어린시절을 뒤돌아보면 누구나 그렇듯이 어머님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한없는 사랑과 부드러운 미소로 보듬어 주셨던 내 어머니의 숨소리와 사랑스런 미소가 내 어린시절 그리움의 전부이며, 당신만 생각하면 한없으신 당신의 사랑과 헌신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지금 생각해 봐도 내 어머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신 분이셨다고 생각이 든다. 가난한 살림에 자식들 먹거리와 학비 걱정으로 한시도 편히 쉬시지 못하고 밤낮없이 고된 인고의 삶을 참아내신 위대한 분이라고 감히 이야기 할 수 있다. 어린시절 내 어머닌 1남 6녀 중 6째이며 외동아들인 나를 아주 엄하게키우셨다. 내가 잘못을 하면 회초리로 말(쌀을 측정하던 도구, 10되가 1말)위에 종아리를 걷고 올라서게 한 후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엄하게 혼을 내셨다. 또한, 질풍노도의 시기인 청소년 시절에는 비뚤어지지 않고 올바른 가치관과 인생관을 형성 할 수 있도록 기다리시며 한숨의 눈물, 솔선수범, 감동을 통한 사랑의 가르침으로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셔서 보통의 사람들과 같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 해주셨다. 이런 내 어머님은 가을철 도토리가 여물면 도토리를 주우러 가시는 것을 좋아하신다. 철없던 시절에는 “그 많은 도토리를 주우셔서 작은 키에 도토리를 머리에 지고오시는 모습을 보면 난 왜 그리도 화가 났는지...” “저 도토리 가져오면, 내가 다 펼쳐서 널고, 매일 저녁에 들여 놓아야하고, 도토리가 마르면 껍질을 까야하고 그다음에 키로 까불러서 도토리알만 고른 후에 물에 한 3일 뿔려야하고....” 난 어머님이 도토리를 주어오시는게 너무 싫었다. 그 뿐만 아니라 겨울철에는 매일 토토리 묵을 만들어서 도토리 무침, 도토리 묵밥, 도토리.., 도토리..., 그래서 난 지금도 도토리 묵을 잘 안먹는다. 이후에 내가 대학을 진학한 후에도 어머님의 도토리 주우시는 일을 멈추시질 않으셨다. 난 속으로는 그만 하셨으면 하면서도 은근히 “어머님이도토리를 주우셔서 묵가루와 도토리 묵을 만들어서 판매하시면 나에게 용돈을 주시겠지“ 하는 못된 속내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였지만..., 대학을 졸업한 후에 직업군인으로 복무를 했기 때문에 어머님을 자주볼 수 없었다. 군에 입대 후 백령도라는 섬에서 근무 후 첫 휴가를 나온 시기도 내 어머님이 도토리 자루를 머리에 지고 오시는 모습에 너무도 가슴이 아팠었다. 아직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어머님 또한 씩씩하고 자랑스러운 해병대 장교가 되어있는 아들이 첫 휴가를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그 날도 도토리를 주어서 머리에 이고 오시는 중이였다. 난 속이 상했지만, 어머님께 “필승!. 해병소위 김기은은 첫 휴가를 명받았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거수경례를 한 후 어머님의 도토리 자루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동안 어머님과 난 한 마니도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도 난 어머님이 만들어 주신 어머님표 도토리 묵을 맛있는 척 먹었다. 이후에 23년의 군 복무를 마치고 명예로운 전역 후 제 2의 인생을 위해 미국회사에 취업 후 약 3개월의 준비기간이 있어서 “미국을 가면 어머님을 자주 못 보니 어머님과 같이 지내야 겠다.”는 생각에 고향집에 머물면서 어머님과 시간을 같이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어머님은 “올해가 도토리가 풍년이라고 도토리를 한가마니만 줏으셔야겠다고 말씀을 하신다”, 난 “무릎 관절염 수술을 하신지 몇 개월 밖에 안되셨으니 그냥 운동 삼아서 조금만 하시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님이 안계서 휴대전화로 전화를 드리니 “ 도토리가 너무 줍고 싶어서 택시를 불러서 산으로 도토리를 주우러 가셨단다.” 어떻게 말을해야 할지 넋을 놓고 있었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에 모든 일을 다 제쳐두고 어머님 계신 산으로 차를 몰아 서둘러 가보니 다리도 불편하신데 팔순을 넘기신 노인분들이 험한 숲을 헤쳐가면서 도토리를 줍고계셨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였다. 이후에 어머님을 모시고 도토리를 주어서 미국에 오기 전 그 3개월 동안 난 도토리를 10가마니를 주었다. 어머님을 위해서...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어머닌 도토리 줍는 일이 즐거워서 하셨던 것이 아니였다. 가난한 시절 농사일을 해도 자식들 학비 충당이 어려웠던 시절 산에 가면 널부러져 있는 도토리를 남보다 부지런하게 서둘러서 그것을 말리고, 고르고, 빻고, 가루를 만들어서 내다 팔면 일년 농사에 정성을 드린 것보다 큰 노력없이 자연이 만들어준 도토리만 주어서 팔면 돈이 되니 이 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있었겠는가? 나 중에 안 일이지만 어머님 이 도토리를 묵가루로 만들어서 장에 내다 팔고 그 돈으로 나 뿐만아니라 당신의 자식들 생활비에 학비를 충당하셨단다. 내가 미국에 올 때 내 어머님은 내 주머니에 용돈을 쥐어 주셨다. 그 돈 또한 내 어머니가 도토리를 주어서 내다 판 그 돈 일이였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난 그 돈을 받았었다. 이 곳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가끔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도토리 묵을 보면 난, 엄마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시계를 처다본다. 어머님께 전화해서 도토리가 올해는 풍년인지 아닌지 핑계삼아 물어도 보고, 건강도 여쭙고,..... 어머니 건강하시고 오래 오래 사세요. 내년 어머님 생신에는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도토리 묵도 맛있게 먹을 거고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립습니다. 어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