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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기고] 불효자는 웁니다

입력: 2025-12-04 10:53:51 NNP info@newsandpost.com

▲글: 권영일 뉴스앤포스트 주필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요
다시 못 올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이 노래는 1940년에 발표된 대중가요로, 작사가·작곡가이자 가수였던 진방남(반야월) 선생이 부른 곡이다.
어머니를 그리는 애달픈 사모곡으로 당시 대중들의 가슴을 울리며 크게 히트했다.
진 선생은 이 곡을 녹음하기 직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듯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불효자는 웁니다’는 최근 작고하신 내 아버지가 생전에 즐겨 부르던 애창곡이기도 하다.
할아버지가 북망산으로 떠나신 후, 아버지는 가사를 ‘아버님’으로 바꾸어 부르셨다.
그 후 할머니가 선종하신 뒤에는 ‘부모님’으로 개사하셨다.
우리 윗세대는 너나없이 모두가 고생을 하던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도 17세부터 집안 살림을 책임지셨다. 할아버지 대신 네 명의 동생을 키우는 일도 모두 당신의 몫이었다.
할아버지는 유학자이셔서 글과 서예에는 능했지만 집안일에는 다소 소홀하셨단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자수성가하신 분이다. 꽃미남형에다 재주도 많으셨지만, 주어진 일에는 누구보다 강한 집념을 보이셨다. 
아닌 게 아니라 초등학교 평교사로는 처음으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29세에 초등학교 교감이 되셨고, 40세에 교장이 되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 학교로 발령을 받자,
“이런 환경에서는 자식들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판단 아래 어려운 결단을 내리셨다.
당신 한 몸을 희생해 자식들을 도시에서 공부시키기로 하신 것이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옛 속담을 몸소 실천하신 셈이다.
결심이 서자 초등학교 교장직을 과감히 내려놓고 중등학교 평교사 자격시험에 도전하셨다. 교장까지 지내신 분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평교사로 근무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처음에는 농업 선생으로, 두 번째는 일본어 선생으로.
덕분에 우리 남매는 모두 대학까지 무사히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5남매 가운데 박사가 3명에다 석사가 1명이니 자랑할 만도 하지 않은가.
아버지도 이후 일본 히로시마에서 한국교육원장까지 역임하셨다. 지금과는 달리 해외여행이 꿈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으니, 전화위복이라 해야 할까.
명예퇴직 후 낙향해서는 유학과 한시에 심취하셨다. 나중에는 문경 향교의 운영 전반을 총괄하는 전교(典校)를 맡아 지역 행사를 주관하셨다.
그렇지만 종교로서가 아니라 학문의 대상으로 유학를 택하셨다.
실례로 살아생전 “내가 죽거든 절대로 제사를 지내지 마라.”고 여러번 유언비슷하게 말씀하셨다. 고인을 기억하기 위해 추도식을 갖는 것은 괜찮으나 종교로서는 부정적이셨다.  
게다가 자식들의 종교 문제에도 전혀 간섭하지 않으셨다. 필자는 유치원 가기 전부터 호롱불을 들고 주일학교에 다녔고, 기복은 있었지만 평생 기독교 신앙을 이어오고 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한 번도 거부감을 보이신 적이 없었다.
평생을 배움과 사람에 바치신 참스승이셨고, 살아생전 가문의 기둥이자 의지처였다.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신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지난 10월 말 새벽, 아버지가 위독해 응급실로 가셨다는 여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폐부종이 원인이라고 들었는데, 갑자기 심정지가 왔다고 했다.
다행히 전기 충격 시술로 한 차례 의식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이내 다시 재발했다.
그래도 ‘능히 이겨내시리라’는 실낱같던 희망은 이내 물거품이 되었고, 결국 소천하셨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나는 곧바로 서울행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15시간을 날아가면서도 아버지가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곧바로 “왔나? 왜 이리 늦었노?”하고 반겨주실 것만 같았다.
하지만 ···
장례 일정과 필요한 행정 절차를 서둘러 마친 뒤 다시 애틀랜타로 돌아와 지금은 일상과 씨름하고 있다.
그동안 소천 소식을 주위에 널리 알리지 않은 것은, 아버지와 더 이상 같은 공간에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전화를 걸어도 더 이상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것이 나를 가슴 아프게 한다.
이제는 내가 사부곡을 부른다.
“다시 못 올 아버지여,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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