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미국


거대한 용광로 뉴욕

글: 수필가 / 칼럼니스트 / 지천 권명오
입력: 2026-08-27 16:25:35 NNP info@newsandpost.com


1974년 이민 오기전 뉴욕에 대해 신문과 방송과 책을 통해 대강 알게 된 나는 뉴욕이 선망의 도시였고 꿈의 도시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은사 이신 윤복현 중대부고 교감 선생님이 이민을 떠나면서 이민 바이러스를 내게 심어주어 운명의 신이 나에게 이민의 길을 열어주었다.
74년 미국 벌티모어에 이민짐을 풀고 1개월 후 뉴욕에 있는 친구 최원용씨를 만나기 위해 그레이하운드 개가 그려져 있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는 동양인과 한국인은 나 뿐 이였다.
뉴욕 행 버스를 타기 전 뉴욕에 대해 알아본 결과 뉴욕은 세계적인 산업도시이고 경제, 문화,  예술의 도시인 동시에 각 나라 사람들이 치열하게 생존경쟁을 펼치고 범죄와 살인강도와 마약과 마피아들이 판을 치는 악명 높은 국제도시의 속해 있는 상태였다.
뉴욕에 도착해 보니 상상할 수 없이 많은 빌딩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고 수 많은 인종들이 뒤엉켜 밀고 밀리고 있어 불안하고 겁이 났지만 태연하게 뉴욕커처럼 택시를 타고 뒷좌석에 길게 앉아 할렘가 167 냇싱톤 에비뉴로 가자고 했다. 그 당시 할렘가는 최악의 우범지역에 해당 됐다.
택시는 친구 상점인 뷰티 앤 기프트 샵 앞에 세워 주었다. 친구와 반갑게 손을 잡은 후 손님들이 너무 많고 정신 없이 바뻐 나도 열심히 장사를 도왔다.
완전히 돗데기 시장이다. 그 당시는 좀도둑과 권총강도도 많은 시기라 전쟁터와 같았다. 7시 지나 상점을 닫고 난 후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비로서 친구와 이런 저런 회포를 풀게 되었다.
친구는 힘들지만 뉴욕이 좋고 장사도 잘 된다며 뉴욕으로 와 함께 살자고 했다. 나는 친구로부터 장사에 관한 경험담과 앞으로 장사를 하게 되면 도와 달라고 했다. 그 당시 나는 뉴욕이 너무 복잡하고 살벌하고 범죄도 많아 살 자신이 없어 고민 끝에 이민 2개월 후 조용한 소도시 더블린 조지아에 가발상을 시작했는데 다행히 장사가 잘돼 6개월후 한국사람이 하나도 없는 라휘엣 루이지아나에 가발상을 또 시작했다.
운이 좋아 장사가 잘돼 매년 한 두번씩 물건도 구입하고 친구도 만날 겸 뉴욕을 자주 오갔다. 그리고 뉴욕에 여러가지 밤 문화도 즐겼다. 계속 사업이 잘돼 한국도 자주가게 됐다.
그런데 그 사이 한국 경제사정이 좋아져 탤런트들의 생활도 엎그레이드 돼 친구들이 나에게 다시 돌아와 함께 살자고 해 옛날이 그리워 어리석게 빨리 돈을 많이 벌어가지고 고국으로 금의환향 해 문화예술사업을 할 야무진 꿈을 위해 각가지 사업을 확장 시도한 것이 실패를 거듭하며 각 도시를 헤맬 때 최원용씨가 뉴욕으로 오면 자기가 책임지고 재기를 돕겠다고 했지만 사양하고 역경을 헤쳐가며 애틀랜타에 정착하게 됐다. 그리고 정이 들어 제2의 고향이 됐다.
어쨌든 뉴욕은 세계 각국 인종들의 장단점이 용광로를 통해 재 창조되는 최대의 도시다. 70년대 뉴욕을 선택한 한인들은 거의다 대성을 했고 필자도 그 당시 뉴욕을 선택 했다면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지난 8월 7일 중앙대학 총 동문회가 뉴욕에서 개최돼 동문들은 9.11 희생자 추모공원에서 묵념을 한 후 크루즈 선상에서 만찬 행사를 하며 휘황찬란한 맨하탄의 야경과 자유의 여신상이 횃불을 들고 환영하는 인류의 거대한 용광로 뉴욕을 감상하면서 옛말에 말과 소 새끼는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 새끼는 서울로 보내라고 했는데 뉴욕은 세계의 서울이다.
뉴욕은 도전과 모험과 꿈이 공존하는 별천지라 뉴욕을 모르면 미국을 모르고 세계를
모른다. 그래도 나는 애틀랜타가 좋다.





※본 기고문은 기고자의 개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 방향 및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newsandpost.com, 무단전제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  기사/사진/동영상 구입 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