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돗데기 시장이다. 그 당시는 좀도둑과 권총강도도 많은 시기라 전쟁터와 같았다. 7시 지나 상점을 닫고 난 후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비로서 친구와 이런 저런 회포를 풀게 되었다.
친구는 힘들지만 뉴욕이 좋고 장사도 잘 된다며 뉴욕으로 와 함께 살자고 했다. 나는 친구로부터 장사에 관한 경험담과 앞으로 장사를 하게 되면 도와 달라고 했다. 그 당시 나는 뉴욕이 너무 복잡하고 살벌하고 범죄도 많아 살 자신이 없어 고민 끝에 이민 2개월 후 조용한 소도시 더블린 조지아에 가발상을 시작했는데 다행히 장사가 잘돼 6개월후 한국사람이 하나도 없는 라휘엣 루이지아나에 가발상을 또 시작했다.
운이 좋아 장사가 잘돼 매년 한 두번씩 물건도 구입하고 친구도 만날 겸 뉴욕을 자주 오갔다. 그리고 뉴욕에 여러가지 밤 문화도 즐겼다. 계속 사업이 잘돼 한국도 자주가게 됐다.
그런데 그 사이 한국 경제사정이 좋아져 탤런트들의 생활도 엎그레이드 돼 친구들이 나에게 다시 돌아와 함께 살자고 해 옛날이 그리워 어리석게 빨리 돈을 많이 벌어가지고 고국으로 금의환향 해 문화예술사업을 할 야무진 꿈을 위해 각가지 사업을 확장 시도한 것이 실패를 거듭하며 각 도시를 헤맬 때 최원용씨가 뉴욕으로 오면 자기가 책임지고 재기를 돕겠다고 했지만 사양하고 역경을 헤쳐가며 애틀랜타에 정착하게 됐다. 그리고 정이 들어 제2의 고향이 됐다.
어쨌든 뉴욕은 세계 각국 인종들의 장단점이 용광로를 통해 재 창조되는 최대의 도시다. 70년대 뉴욕을 선택한 한인들은 거의다 대성을 했고 필자도 그 당시 뉴욕을 선택 했다면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지난 8월 7일 중앙대학 총 동문회가 뉴욕에서 개최돼 동문들은 9.11 희생자 추모공원에서 묵념을 한 후 크루즈 선상에서 만찬 행사를 하며 휘황찬란한 맨하탄의 야경과 자유의 여신상이 횃불을 들고 환영하는 인류의 거대한 용광로 뉴욕을 감상하면서 옛말에 말과 소 새끼는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 새끼는 서울로 보내라고 했는데 뉴욕은 세계의 서울이다.
뉴욕은 도전과 모험과 꿈이 공존하는 별천지라 뉴욕을 모르면 미국을 모르고 세계를
모른다. 그래도 나는 애틀랜타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