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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현 칼럼] 주일은 선택이 아니라, 생명을 건 신앙고백이다
[아들에게 쓰는 신앙서신 - 80번째 이야기]
기사입력: 2026-07-10 07:45:31
작성자: NNP info@newsandpost.com

| ▲임석현 담임목사, 나눔장로교회 |
| 팬데믹 이후, 교계에는 예배를 대하는 매우 위험하고도 세속적인 풍조가 자리 잡았다. 언제 어디서든 클릭 한 번으로 드리는 온라인 예배가 일상화되면서,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주일(主日)'이라는 신성한 관념이 급격히 희미해진 것이다. 오늘날의 예배는 점차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순종의 자리를 잃고, 성도의 형편과 상황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보편화된 서비스’로 변모하였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하신 말씀이 무색할 만큼, 예배의 본질은 인간의 편의주의라는 늪에 빠져 흐려지고 있다. 가장 먼저 바로잡아야 할 것은 ‘워십 서비스(Worship Service)’라는 용어에 담긴 심각한 오류이다. 교회 안에서 예배를 그저 ‘서비스’라 부르는 것은 예배의 본질을 정면으로 왜곡하는 일이다. ‘서비스’라는 말이 붙는 순간, 예배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그저 인간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평가하는 고객으로 전락하고, 예배는 성도들의 만족을 채워주는 프로그램으로 격하된다. 우리가 드리는 것은 예배(Worship)이지, 사람에게 베푸는 서비스(Service)가 아니다. 개혁주의 예배는 결코 '인간의 만족'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예배의 성공 여부는 화려한 순서나 감동적인 음악, 혹은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메시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그 말씀 앞에 우리의 죄가 낱낱이 드러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만이 선포되었는가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예배는 나의 기분을 고양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그분의 거룩함 앞에 무릎 꿇는 경외의 시간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주일은 단순히 모이는 시간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생명 그 자체였다. 사도행전 20장 7절은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고 기록한다. 여기서 '떡을 뗀다'는 것은 단순히 식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이자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는 예식이었다. 그들에게 주일은 세상의 시간 속에 섞여 살아가는 이방인들과 자신들을 구별 짓는 유일한 영적 경계선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이 단순히 육체의 몸을 교회라는 공간 안에 두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몸은 교회에 와 있으나 마음은 여전히 세상의 염려와 육체의 소욕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을 온전한 주일 성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이 물질의 액수가 아니라 중심을 드리는 것이듯, 주일을 지킨다는 것 역시 육체의 소욕을 내려놓고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하며 그분을 향한 온전한 마음을 드리는 과정이다. 이는 바울이 육체의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가 참된 신앙의 증거임을 강조했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주일 성수는 의식의 반복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지성소를 부활의 생명으로 정결케 하는 영적 할례의 현장이어야 한다. 히브리서 10장 25절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권면한다. 주일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마땅히 모여야 할 생명의 날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어떠한가? 예배를 ‘부담을 해소하고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 점이 가장 큰 병폐이다. 최근 일부 교회들이 주일의 부담감을 덜어준다는 명목으로 토요일과 주일 중 하나를 선택해 예배를 드려도 된다고 가르치는데, 이는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발상이다. 물론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 못하는 성도들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려는 목회적 고민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일 예배는 어느 날에 드려도 상관없다'는 발상은 예배의 본질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매우 위험한 사고이다.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개인의 연약함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연약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주일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결단과 용기, 그리고 환경을 열어달라고 간절히 구하는 것이 마땅한 성도의 자세이다. 교회가 예배의 본질적 근간을 스스로 완화하고 타협하는 것은 결코 허용될 수 없다. 우리는 안식일과 주일의 신학적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안식일은 위에서 아래로 명령하신 계명이었으나, 주일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안식을 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아래에서 하늘로 자원하여 올려드리는 고백이다. 안식일이 '명령의 준수'라면, 주일은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 일부에서는 구약의 율법적 문자주의에 매여 토요일 안식일을 고집하기도 하지만, 이는 복음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부활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를 알지 못하기에 빚어지는 오류이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자들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시는 분이다. 주일을 지키고자 하는 성도의 간절한 소원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예배할 수 있는 환경을 친히 조성하시며, 심지어 사람이 걸어가는 길조차 주권적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주일 성수는 결코 율법의 멍에가 아니며, 주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은혜의 길을 걷는 복음적 자유이다. 사단은 '굳이 주일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로 신앙의 긴장감을 분산시키지만, 우리는 편리함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택해야 한다. 주일의 가치를 보편화하고 예배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치밀한 계략임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복음 외의 인본주의적 절기들을 1년 내내 의식화하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한다. 갈수록 기독교가 철학이나 인문학적 교양 공동체로 전락하는 현상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교회는 세상의 철학자를 기념하는 곳이 아니라, 사도행전 4장 12절 말씀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선포하는 곳이다. 우리의 예배가 상달되는 유일한 근거는 인간의 열심이 아니라,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중보 사역임을 기억해야 한다. 훗날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 목회의 길을 걷게 될 때, 그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세상의 타협안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성도들의 연약함으로 인해 품어야 할 영역이 분명히 존재하겠으나, 복음의 핵심과 직결된 문제 앞에서는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선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주일 예배의 날을 변경하거나 그 본질을 타협하는 일은 목회자의 사전에서 결코 있을 수 없음을 나는 아들에게 유언과 같이 당부하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또한 기억하기 바란다. 주일 성수는 결코 우리의 기분에 따른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치열한 영적 싸움이다. 이제 세상의 편의주의를 걷어내고, 오직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주의 날을 온전하게 회복해야 한다. 이것이 무너져가는 이 시대 속에서 바른 신앙을 지켜내는 시작점이자,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필연을 경험하는 통로이다. 2026년 7월 8일, 주일 예배에 대한 소중함을 잊어버리는 이 시대를 보며...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작은 모퉁이에서 주님이 맡기신 교회를 눈물로 섬기는 임석현 목사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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